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고둔 사건 (문단 편집) == 결말 == 관동군의 소행으로 장쭤린이 사망하기에 이르렀지만, 이때까지 일본 정부는 군대에 대한 통제권을 아주 놓아버린 상황은 아니어서 그 후속조치에 해당되는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후지와라 아키라는 만약 이때 정부가 군에 대해 통제하지 않았으면 만주사변은 3년 일찍 일어났을 것이라 평했다. 장제스를 막기 위해 양위팅, 장쭤샹, 쑨촨팡과 함께 군사를 지휘하던 장쉐량은 산해관 너머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장쭝창에겐 장제스에게 투항할 것을 설득하는 한편 나머지 봉천군 3만명을 데리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6월 17일 봉천으로 돌아왔다. 장쉐량이 봉천으로 돌아와 봉천성 독판이 되어 장쭤린을 승계하기 위해 움직이고 나서인 6월 21일에야 봉천독판공서 명의로 장쭤린의 죽음이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이후 봉천군벌의 수장 자리를 두고 정쟁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장쭤린의 자리는 장쭤린의 아들인 장쉐량이 계승하였다. 장쉐량은 [[동북역치]]를 단행하여 국민정부에 합류하였고 이로 인하여 중국은 위안스카이 사후 10여 년 만에 통일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고작 2년만에 [[만주사변]]이 일어나게 됨에 따라 일본의 본격적인 중국 침략이 일어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